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국공합작 (문단 편집) === 쑨원-달린 회담 === 이후 쑨원은 러시아의 혁명을 찬양하는 여러 발언을 쏟아냈다. 1922년 1월의 담화에서 쑨원은 프랑스와 미국은 낡은 공화주의 모델을 대표하지만 러시아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냈으며 중국은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최신 모델을 만들 것이라고 선언했고 같은 달 병사들을 향한 연설에서 소비에트의 목표에 대해 찬양하며 평균지권과 기간산업의 국유화 방침을 고수할 것임을 밝혔다. 시프린은 당시 쑨원의 연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쑨원|그]]는 사회적 격변과 다목적 혁명의 가능성을 보이기 위해 러시아를 예로 들었다. 러시아의 정치적 혁명과 사회적 혁명의 결합은 그의 삼단계 방략에서 한 단계가 모자랄 뿐이었다. 그는 "우리는 잘못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하면서 새로운 세계는 공자가 이상화했던 "위대한 도가 실현되어 모두가 같이 향유하는 세계이며 (...) 현재는 새로이 수립된 러시아 정부만이 그에 닮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러시아 혁명이 비록 [[신해혁명|중국혁명]] 뒤에 일어났지만 러시아 혁명은 공공복지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북극권에 위치한 데 비해 중국은 온대에 위치하고 러시아에는 자본가들이 존재하는 데 비해 중국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중국이 궁극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고 느꼈다.|| ||손문평전, 215페이지|| 다만 1922년 6월까지 쑨원은 [[바이마르 공화국]]이나 일본, 영국, 미국과의 합작에 대해서도 완전히 포기한 상태가 아니라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쑨원은 1922년 4월 [[라팔로 조약]]을 체결해 [[소비에트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맺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큰 기대를 걸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미 1921년 5월, 유럽 국가 중에서는 최초로 중국을 평등과 호혜의 원리에 따라 대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국제법이 통상적으로 규정하는 외의 어떠한 치외법권이나 특수권익도 포기했다. 독일 측에서도 [[치머만 전보 사건]]을 주도한 바가 있는 전 외무장관 파울 폰 힌체(Paul von Hintze)가 러시아와 국민당을 연결하는 3각동맹을 구상하며 쑨원과 접촉하고 있었다. 1922년 5월 파이케스는 코민테른 대표 세르게이 달린을 보내 쑨원과 협의하게 했다. 달린은 통일전선의 이점에 대해 설명했지만 쑨원은 광저우에 러시아 공산당 간부를 파견하고 광저우와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도로 건설 지원을 요청할 뿐 한커우를 점령한 후에야 소비에트 러시아를 승인하겠다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몽골이 중국의 불가분의 일부로 몽골에 대해서도 타협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볼셰비키와 합작하려는 조속한 움직임은 영국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달린과의 회담 직후 [[영풍함 사건]]이 터졌고 영풍함 사건에서 영미에게 실망한 쑨원은 바이마르 공화국과 볼셰비키에게 더욱 기대를 걸게 되었다. 허나 1922년 9월 쑨원이 광저우에 두고 간 외교문서들이 천중밍에게 노획되어 홍콩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소비에트 러시아-국민당 3각 동맹이 폭로되었다. 쑨원은 자신이 공산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면서 영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고 밝혔지만 원래도 쑨원의 지위를 의심하고 있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이 쑨원과의 모든 공식적 관계를 부인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합작도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남은 것은 볼셰비키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